
[편집자 주]
총동문회가 지난 6월 24일, 창립 74주년을 맞았다. 이를 맞아 총동문회보는 앞으로 3개 호에 걸쳐 총동문회 74년의 역사를 3개의 키워드에 맞춰 조명해본다.
(1) 플라타너스의 끈질길 생명력과 함께한 태동기
(2) 총동문회의 기반을 세운 ‘거인’ 유기정
(3) 모교의 발전을 위해 실천하는 총동문회

총동문회의 역사는 크게 모교와 함께 자리를 잡기 위한 태동기, 종합대학 승격과 함께 단단한 기반을 만들어낸 발전기, 모교 발전을 위해 노력하며 미래로 나아가는 현재 등 3가지 키워드로 설명할 수 있다. 여기서 개교 이래 창성동 구 교사 앞에서 70여 년간 자리를 지켜온 플라타너스는 치열했던 태동기를 상징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동문회의 시작과 함께했던 플라타너스
총동문회는 1950년 6월 24일, 모교 제1회 졸업식과 같은 날 태어났다. 영광의 첫 졸업생들은 이를 기념하고자 창성동 교사 앞에 졸업생 전원의 이름을 새긴 플라타너스를 심었다. 뿌리를 단단히 내리면서 생명력이 매우 강한 것으로 알려진 플라타너스, 1회 졸업생들이 입학 이후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그만큼 적절한 수종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방 이후 민족을 발전에 헌신하고자 입학한 1기 입학생들은, 학업보다 모교의 생존을 위해 싸워야 했다. 해공 신익희 선생의 가르침에 이끌려 입학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 군정기와 정부 수립 초기의 혼란 속에서 교사는 다른 시설을 빌려 쓰는 처지였고, 소유권 분쟁도 잦았다. 이에 학생들은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며 학교를 지켰고, 교사건축위원회를 직접 설립해 창성동 교사를 학생들의 힘으로 건설했다. 이는 당시 학생들 대부분이 직장을 또는 자기 사업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교사 설립 외에도 학교의 재정난으로 인해 교직원이 부족하여 학생들이 직접 경리과장, 총무과장을 맡아 운영에 참여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학업을 마치고 첫 졸업장을 받았기에, 자신들이 만들었던 학교가 강한 생명력으로 이어지길 원하는 마음으로 플라타너스를 심게 된 것이다.
전쟁의 혼란 속에도 꿋꿋이 성장한 동문회
창립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제1회 졸업식 바로 다음 날, 6.25 전쟁이 터진 것이다. 창립식을 마치고 태화관에서 해공 신익희 선생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동문들은 바로 피난 짐을 싸야 했다. 하지만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동문회는 끈질기게 명맥을 이어 나갔다. 군에 장교로 입대한 동문들은 피난지에 설립된 전시연합대학 운영에 도움을 줬으며, 전쟁 중이었던 2대, 3대 총동문회에선 모교와 동문의 매개가 될 수 있었던 동문 교직원들이 회장을 맡아 조직을 유지해 나갔다. 특히 재학시절 모교를 지키기 위한 각종 행동을 주도했던 3대 김진옥(정치 46 회장은 그 이전의 1인 동문회를 탈피하고 부회장 2인, 총무부장을 임명해 조직을 안정, 확대시키고자 했다. 6.25 전쟁 휴전 협상이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 당시 농업은행 부총재였던 이호상(정치 47) 동문이 4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4기 동문회는 휴전 이후 ‘국민대학 동문회 지부 설치에 대한 세칙’을 제정하여 사회 각지에 퍼져있던 동문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
휴전 이후 동문회가 다시 기반을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 모교의 설립자인 해공 신익희 선생이 대통령 선거 중 급서하는 비극을 겪는다. 이에 동문들은 해공 선생의 뜻을 기리고 모교를 지키기 위하여 장례위원회를 빠르게 조직해 활동하였으며, 이후 해공 선생 추모행사는 동문회의 주요 구심점으로 자리 잡았다.

혼란을 이겨내고 체계를 잡기 시작한 동문회
해공 선생 추모 사업으로 동문회의 구심점이 유지되던 가운데 감사원(당시 명칭 심계원)에 근무하던 박영재(경제 47) 동문이 1959년, 9대 동문회장으로 선출됐다. 박영재 회장은 동문회 기본재산 확보를 위하여 전화를 처음 가설하고, 이를 임대하여 운영기금과 장학기금을 마련했다. 이를 통해 1960년에 최초로 재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했으며, 1961년에는 동창회원명부도 발행하는 등 각종 성과를 이뤄냈다. 이뿐만 아니라 당시 박영재 회장은 학교를 인수한 성곡 김성곤 선생에게 제대로 학교를 운영해달라는 의사를 언론 및 다양한 수단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전달하면서 모교 발전을 위한 마중물 역할에도 충실했다. 여기에 해공 신익희 선생의 동상 건립을 위하여 다방면으로 노력하였으나 이는 이승만, 박정희 정권의 비협조로 성사되지는 못했다. 이러한 노력은 결실을 보게 되어, 1967년에 취임한 조한백(정치 47) 회장은 최초로 사무국을 만들게 되었고 1969년에 이르러서는 동문회보도 최초로 발간하게 된다.


참화 속에도 우뚝 선 플라타너스를 기념하다
1970년에 이르러 총동문회는 창립 20주년을 맞이한다. 이때 모교는 창성동에서 자립의 시기를 마무리하고 정릉캠퍼스 이전을 통한 도약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졸업 20주년을 기념하여 모교에 다시 모인 1회 졸업 동문들은 6.25 전쟁과 4.19 혁명 등 각종 참화 속에서도 20년 동안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던 플라타너스를 보며 감동했다. 이에 벅찬 마음을 담아 다음의 글을 비에 새긴 후 플라타너스 옆에 세우게 된다.
모교, 동문회와 영원히 함께할 플라타너스
70년 넘게 창성동 교사를 지키던 플라타너스는 지난 2021년 구 창성동 교사 철거과정에서 아쉽게도 벌목되었다. 모교로 옮기고자 하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70년 동안 크게 자란 나무는 뿌리가 깊게 내려 이식하기 쉽지 않았고, 수령이 오래됨에 따라 사고의 위험까지 커졌기 때문이다.
다만, 벌목 이후 나무의 밑동 일부를 채취하여 보존 처리한 후 제1회 졸업생들의 기념비와 함께 모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으며 벌목 직후에는 재학생과 창성동 교사에서 수학한 동문이 함께 기억을 전승하는 행사도 진행하며 정신을 이어 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한편, 구 창성동 교사는 현재 정부서울청사 별관으로 재건축 중인데 총동문회는 정부청사관리본부와 함께 당시 플라타너스가 서 있던 자리에 창학 기념비와 플라타너스 관련 기억공간을 조성하고자 논의 중이다. 우뚝 서 있던 플라타너스를 지금은 볼 수 없지만, 나무에 깃들었던 우리 동문의 간절한 마음은 영원히 전승될 것이다.
[참고문헌]
– 국민대학교 역사자료집 2(2007, 국민대학교 교사자료위원회)
– 국민대학교 60년사(2007, 국민대학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