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유일의 민족사학이라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지닌 국민대학교 총동문회의 소사를 살펴 보자
- 1946년 보인상업고등학교 교실 두 칸을 빌려 개교한 우리 학교가 최초로 졸업생을 배출한 것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하루 전인 1950년 6월 24일. 제1회 졸업생들은 졸업식과 함께 총동문회 발족식을 가졌다. 그로부터 70년의 시간이 흘렀고, 우리 총동문회는 번듯한 동문회관과 장학재단을 거느린 알찬 단체로 성장했다. 그동안 모교를 거쳐한 동문은 13만여 명에 이르고, 현재 모교에는 1만 5000여 명에 이르는 북악인들이 학업에 정진하고 있다.
1. 창립기
1회 졸업생이 배출되던 해인 1950년 6월 20일, 총동문회 회칙이 제정되었다. 6월 22일에는 정식으로 창립대회를 열어 회칙을 결의하고 이옥영 (경제 1회)을 초대 회장으로 선출했다. 6월 24일 1회 졸업생이 배출되면서 정식으로 국민대학 총동문회가 발족됐다. 이 날 1회 졸업생들은 졸업 기념으로 창성동 교정에 플라타너스를 기념식수했다.
(당시 식수된 플라타너스는 2021년까지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나무의 수명이 다하여 플라타너스 일부를 구 창성동 교사 철거 당시 채취해와 모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그러나 다음날 한국전쟁이 발발해 총동문회는 활동은커녕 명맥조차 이어가지 못할 상황에 처했지만 부산에 설치된 전시대학에서 동문들이 모임을 만들면서 총동문회를 재개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다.
1953년 5월 10일 ‘국민대학 동창회 지부 설치에 관한 세칙’을 제정해 지방에까지 총동문회 조직이 확대됐다. 1956년 해공 신익희 선생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자 많은 동문 들은 해공 선생을 돕기 위해 발 벗고 뛰어다녔다. 5월 5일 해공 선생이 갑자기 서거하자 동문들은 장례를 차질 없이 치르는 데 일조하고 이후 총동문회에서 해공 추모행사를 개최하면서 동문 모임도 활기를 띠게 됐다.
한편 해공이 급서하면서 그동안 계속돼온 모교의 재단분규 문제가 더욱 심화됐다. 정병조 전 이사장의 재산기부 거부로 불거진 재단 분규는 1955년 8월 모교가 문교부의 임시관리체제로 운영되는 사태로 이어졌다. 또한 자유당 출신 국회 부의장이 우리 대학을 접수하려 하자 동문들은 이를 적극 저지하고 나섰다.
2. 준비기(1960년대)
1959년 박영재(경제 2회) 동문회장은 동문회의 기본재산 확보를 위해 동문회 소유의 전화를 가설, 임대하여 동창회장학금 재원으로 충당했다. 1960년 동창회관을 마련하고자 했지만, 4·19혁명 후 제기되는 다른 사업 추진 관계로 이뤄지지 못했다. 1960년 1월 21일 ‘국민대학동창회장학금 규칙’을 제정하였다.
5월 1일 ‘고 해공 신익희 학장 동상 건립위원회’ 발족, 8월 13일 규약 제정, 10월 15일결성대회를 개최했지만 동상을 세우려 했던 장충동 교지가 확보되지 않아 무산되었다. 장충동 교지 3만평은 1958년 이승만 정권 당시 불하받았으나 이승만이 영빈관을 짓겠다며 불하를 취소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물러나자 교지를 되찾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했지만 박정희 정권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아 수포로 돌아갔다.
1960년 동창회원 명부를 발간했다. 1963년 국민대학 병설 국민여자초급대학이 제1회 졸업식을 맞이하자 초급대학 졸업생도 보통회원이 될 수 있도록 회칙을 개정했다. 1965년 2월 민유동(경제 1회) 동문회장은 모교 교수 및 교직원, 재단이사장 및 상임이사, 학생회장 등을 초청해 ‘국민대 발전을 위한 대토론회’를 개최했다.
이 시기부터 재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동문이나 작은 조직들이 생겨났는데, 학과별 동문회가 태동하여 동문 간 단합이 다져지면서 1969년 6월 ‘국민대동문회보’ 창간호가 발간됐다..
3. 도약기(1970년대)
총동문회 위상을 제고하기 위해 당시 제14대 신관섭 동문회장은 부회장직을 2명에서 5명으로 늘렸다. 또한 처음으로 총동문회 사무실을 을지로3가에 마련하여 조직 정비를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다.
1970년 6월 제1회 졸업생 모임인 일우회는 1회 졸업을 기념해 식수한 플라타너스 옆에 기념비석을 세웠다. 식수일 바로 다음 날 터진 6.25전쟁의 참혹함과 4.19 혁명의 총격전속에서도 꿋꿋이 서있던 나무를 바라보며 졸업 20주년을 회상한 뜻깊은 내용이 담겼다. 이 비석은 1998년에 모교 박물관으로 옮겨져 현재는 플라타너스 나무 일부와 함께 전시되어 있다.
1971년에는 초대 회장이었던 이옥영 동문이 다시 동문회장에 선출되면서 동문회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매년 해공 서거일에 맞춰 55 추도식을 열었으며 연합춘계배구대회를 개최하면서 친목을 도모했다. 모교는 이 시기에 13년 간의 창성동시대를 마감하고 정릉 북악캠퍼스로 이전해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1978년에는 10여 년 만에 동창회원 명부가 발간됐다.
4. 발전기(1980년대)
1981년 모교가 종합대학으로 승격했다. 81년에 취임한 유기정(경제 4회) 총동문회장은 총동문회 운영의 전통기반 조성, 종합대학교 동문회로서의 긍지 정립, 친목사업 강화, 해공동상 건립 등을 기본 목표로 동문회 활성화를 위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1만명 동문찾기 운동, 동창회 영구회비 납부자 2000명 모집 등의 사업을 펼쳐 동문회 발전의 기틀을 다졌다. 1982년 4월 19일 새로운 해공 동상 건립 취지문과 규약을 제정하고 1억원 모금운동에 들어갔다. 또한 김동일(경제 11회) 동문의 협조로 종로3가에 총동문회 사무실을 마련해 조직기반 조성을 위한 거점을 마련하고 새롭게 출발했다.
또한 1982년에는 동문회보가 8년 만에 지령 10호로 속간되었으며, 5월 1일에는 해공 신익희 선생 동상 건립 모금을 위한 광고가 동아일보 1면에 게재되었다. 이에 호응한 수천명의 동문들이 5월 5일 해공 신익희 선생 기일을 맞아 수유리 모역을 참배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탄생한 ‘해공 동상건립위원회’는 약 1년 동안 열정적인 동상 건립 모금운동을 진행했다. 모금 참여는 재학생부터 원로 선배, 그리고 먼 해외에서도 정성이 답지하는 등 큰 호응을 얻었다. 동문 수천 명의 성금으로 마련한 동상은 해공 선생 90회 탄신일인 1983년 7월 18일 제막식에서 공개되었으며, 지금까지 모교 본부관 앞에 자리잡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동상 건립 이후 동문회 활동은 탄력을 받아, 1986년에는 첫 ‘국민인의 밤’행사를 개최하여 ‘자랑스런 국민인의 상’을 시상하기 시작했으며, 5년 간의 모금 활동 끝에 1989년에는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구 교사 인근에 총동문회관을 마련해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1990년 독립기념관에 해공 어록비가 건립됐다.
5. 중흥기(1990년대)
1991년 1월 24일 재단법인 국민대학교해공장학회가 설립됐다. 총동문회는 1960년부터 매 학기 장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여 왔으나, 정식 재단법인이 아닌 총동문회 경상비로 지급해오던 것을 정식 법인으로 승격시킨 것이다.
이를 위하여 1990년 1월 14일 (가칭) 국민대학교 해공장학회 설립모임이 개최되었으며, 당시 국민대학교 이규석 총장이 학교에서 신탁관리하고 있던 재학생, 동문 모금액을 이관받았다. 여기에 해공어록비 사업 후 잔액과 동문들의 성금을 더해 기본재산 1억 1천만원으로 설립된 장학재단이다. 1991년 설립 첫 해에 1인당 50만원의 장학금을 총 16명에게 지급했으며, 2023년 현재까지 8억 5천만원이 넘는 장학금을 지급해 오고 있다.
1993년에 취임한 심상은(경제 11회) 동문회장은 재정 안정을 위해 연회비 납부운동을 벌였다. 또 정확한 동문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동문회원관리 전산프로그램을 개설해 동문회보와 우편물을 발송함으로써 전산화 시대를 맞이했다. 이로써 매해 새롭게 배출되는 동문 명단을 모교로부터 받아 전산입력해 정확한 동문명단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연 1회 발행되던 동문회보를 격월로 정기발행했다.
1995년에는 전국 대학 총동문회 협의체인 전국대학동창협의회에 가입하였다. 우리 국민대학교총동문회는 자체 동문회관과 장학재단을 보유하고 있는 몇 안되는 동문회였고, 대학 동문회로선 빠른 시기에 데이터베이스 전산화를 이룩했기에 타 대학 동문회의 모범이 되었다.
1999년 5월 성곡 동상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동문들의 모금으로 성곡 김성곤 선생 동상이 모교 성곡도서관 앞에 제막되었다. 현재는 모교 본부관 앞으로 옮겨져 자리를 지키고 있다.
6. 재도약기(2000년대)
2001년 총동문회 홈페이지가 개설됐으며, 이전에 전산화된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윈도우 기반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전 동문 관리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새롭게 개설된 홈페이지에는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 자신의 정보를 조회할 수 있도록 하여, 인터넷 상에서 동문들이 편리하게 자신을 조회하고 정보를 수정할 수 있게 됐다.
30회기부터 최고 의사 결정기관으로 전 동문을 대표해 총동문회 사업내용을 심의하는 운영위원회가 신설됐다. 또한 지부의 재창립총회를 유도하는 한편 지부조직이 없는 지역에 지부결성을 위한 동문연락망 구축을 지원했다. 2006년 9월 9일 개교 60주년을 맞이해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국민대 가족 한마당 행사를 열었다.
2007년 10월 17일, 개교 61주년 기념식에서 장영달 총동문회장이 모교에 발전기금 1억원을 기탁했다. 2008년 10월 31일 날로 침체되어가는 모교의 현실을 타개하고 발전을 모색하기 위해 모교 교수, 동문, 총학생회 등이 참여하는 ‘국민대 발전을 위한 대토론회’를 개최했다.
2008년 11월 24일 그간 발행된 총동문회보를 합철 제본해 총동문회관에 보관하는 한편 모교에 기증했다.
2010년 1월 4일에는 유기정 전 회장이 노환으로 별세하셨다. 유기정 전 회장은 모든 것이 척박한 시절 총동문회장직을 10여 년간 맡으시며 그야말로 모교와 총동문회 발전을 위해 헌신하셨으며, 총동문회 숙원사업이던 총동문회관 건립과 해공 신익희 선생 동상과 어록비 건립, 해공장학회 설립 등 남긴 업적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에 고재일 총동문회장이 직접 추도사를 낭독했고, 많은 동문들이 찾아 애도 했다.
2010년 4월 13일 고재일(경제60학번) 총동문회장이 당연직 이사로 해공장학회 이사장에 취임했다. 2010년 6월 24일 총동문회 창립 60주년 기념식에서 해공장학회에 기금 1억6천만 원을 출연했다. 2010년 11월 3일 제1회 총동문회장배 골프대회가 용인88CC에서 많은 동문들이 함께해 성황을 이루었다.
7. 제2도약기(2010년대)
2011년 10월 7일 제34-2회기 정기총회에서 제35대 총동문회장으로 윤종웅(경제 69학번) 동문이 선출되었다. 윤종웅 회장은 ‘행동하는 동문회, 힘 있는 동문회, 도움 주는 동문회’를 슬로건으로 삼고, 동문간의 화합과 단결, 모교의 발전을 위해 각종 사업을 추진했다.
윤종웅 회장이 재임하던 기간 총동문회는 모교가 위기에 빠졌을 때,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섰다. 2012년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 선정 당시에는 재단과 학교당국의 혁신을 요구하는 ‘재단 퇴진을 위한 국민대 동문 결의대회’가 많은 동문들과 재학생 후배들이 참석한 가운데 모교 북악관 앞 민주광장에서 열었다. 이를 통해 2012년 12월 오랜 숙원이던 학교법인 국민학원 이사회에서 개방이사로 윤종웅(경제 69학번) 총동문회장이 동문 개방이사로 선임되어 모교의 의사결정에 공식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동안 미진했던 동문 교수 및 동문 교직원 채용도 상대적으로 활발해졌다. 2015년에 재단이 부당하게 총장 연임 규정을 개정하려던 때에도 동문들은 재학생과 함께 모교 본부관 앞에 모여 규탄대회를 열고, 재단퇴진운동본부를 조직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친 끝에, 재단 및 학교본부와 상생과 화합의 길을 함께 하기로 하였으며 윤경우(중문 82) 모교 국제학부 교수가 동문으로선 최초로 부총장(대외협력부문)에 임명되기도 했다.
또한 힘있는 총동문회를 만들기 위해 재정 확충 및 전 동문이 참여할 수 있는 행사를 기획하였다. 먼저 2012년 9월 후배 장학기금과 발전기금 모금을 위한 ‘CMS(소액기부제) 모금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2018년 2월 현재 총 1,876구좌에 약 1억7천8백만 원이 모금되었으며 이 중에서 약 1억 5천만원이 기부되어 총동문회 및 장학회 활동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리고 지난 2014년에는 11년만에 동문명부를 재 발간하였고, 체육대회, 등산대회 등 전 동문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행사들을 신설했다. 총동문회장배 골프대회도 내실있는 기획을 통해 참가자가 2배 이상 증가하는 등 참여를 통한 동문회 활성화가 이뤄졌다.
그리고 총동문회는 모교 전 구성원과 함께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동문회가 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먼저 2011년 11월 19일 모교에서 일사일구(一社一求)운동’의 일환으로 윤상규(경영 90학번) 네오위즈게임즈 대표가 ‘동문 CEO 초청 후배와의 대화 겸 인턴십 채용설명회’가 열렸으며, 동문-재학생간 멘토링 행사를 지속적으로 개최하였고, 모교 재학생을 위한 해공장학회는 기본재산이 2011년 대비 2배 이상 증가했으며, 2018년부터는 생활비 장학금도 신설되어 어려운 환경에 있는 재학생을 돕고 있다. 그리고 모교에는 2013년 5월 2일 해공선생의 건학이념이자 교훈인 ‘이교위가 사필귀정’ 새긴 교훈탑을 기증하였으며, 동년 6월 26일에는 성곡선생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여 본회에서 성곡 선생 어록비를 기증하여 해공선생과 성곡선생의 업적을 기렸다.
2017년 9월 28일 모교 예술관 대극장에서 열린 37-2회기 정기총회에서는 지난 6년간 헌신한 윤종웅 회장에 이어 박해진(토목 76학번)동문이 총동문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박해진 동문은 ‘화합단결하는 동문회, 실천하는 동문회, 동문총장 선출’을 38회기 총동문회의 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완수하기 위하여 총동문회 산하에 화합단결위원회, 모교발전기금조성위원회, 동문총장선임추진위원회를 설립하여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8. 현재(2020년대)
다른 대학을 넘어 최고의 동문회를 만들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2020년대를 맞이한 총동문회는 당해년도 1월 신년하례식을 역사상 가장 성대하게 개최하면서 문을 열었다. 곧이어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움츠려든 가운데서도 우리 동문회는 멈추지 않않았다.
엄중한 상황 속에서도 동문회관 리모델링 사업비 1억 6천만원 전액을 전 동문의 힘으로 충당하여 사업을 완수하였다. 300여명이 넘는 동문과 단체가 십시일반 모금에 참여하여 새롭게 단장한 동문회관은 쾌적한 시설로 전 동문의 사랑방으로 자리잡았다.
또한 다년 간의 노력끝에 약 10억원이 넘는 발전기금을 모교에 전달했으며, 2023년에는 총동문회 발전을 염원하는 많은 정성도 답지하여 동문 데이터베이스 현대화 사업 또한 완수하였다.
여기에 총동문회는 더 많은 동문들이 즐겁고 행복한 동문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조성했다. 2020년에 발족된 여성동문회는 정기적인 세미나를 개최하면서 동문 사회 한 축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2022년에는 명사를 초청하여 동문과 함께 지혜를 나누고자 만든 국민人포럼도 성공적으로 안착하였다. 그리고 2023년에 창설된 동문 합창단은 당해년도 정기총회에서 제1회 공연을 가지며 즐겁고 행복한 동문회의 훌륭한 예로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