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총동문회가 지난 6월 24일, 창립 74주년을 맞았다. 이를 맞아 총동문회보는 앞으로 3개 호에 걸쳐 총동문회 74년의 역사를 3개의 키워드에 맞춰 조명해본다.
(1) 플라타너스의 끈질길 생명력과 함께한 태동기 -> 이 줄은 굵게 표시해주세요
(2) 총동문회의 기반을 세운 ‘거인’ 유기정
(3) 모교의 발전을 위해 실천하는 총동문회
총동문회의 역사는 크게 모교와 함께 자리를 잡기 위한 태동기, 종합대학 승격과 함께 단단한 기반을 만들어낸 발전기, 모교 발전을 위해 노력하며 미래로 나아가는 현재 등 3가지 키워드로 설명할 수 있다. 모교가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던 1981년부터 1991년까지 10년 동안, 총동문회는 해공 신익희 선생 동상 건립, 동문회관 마련, 해공장학회 설립 등 유례가 없는 발전을 이루었다. 이 눈부신 도약의 중심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유기정 前 총동문회장(20~24대, 재임기간 1981.10.1.~1991.9.30.)이다.

침체된 동문회를 수습하다
70년대 후반에 들어와 동문회 활동은 침체 상태였다. 회장과 지도부는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은 조성되지 않았다. 임원진의 지시를 집행할 사무처는 존재하지 않았고, 사무실도 집기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69년에 창간된 회보는 얼마 가지 못해 휴간됐다. 당연히 찬조금 및 회비납부 실적 또한 부진했다.
1981년에 모교가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며, 동문 사회에서는 모교의 위상에 걸맞는 총동문회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널리 퍼졌다. 이에 3선 국회의원을 역임하고 중소기업중앙회장 직을 맡고 있던 유기정(경제 4회) 동문을 20대 총동문회장으로 추대하게 된다.
유기정 회장은 취임 후 조직을 정상화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조직 활성화를 위해선 재원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본인이 5백만 원(현재 가치 2천만 원 이상)을 쾌척하며 1천만 원에 가까운 찬조금을 단기간에 확보했다. 이렇게 확보된 자금으로 유기정 회장은 처음으로 상설 사무국을 설치하고, 동문 명부 최신화 작업과 함께 동문회보도 취임 4개월 만에 속간시켰다.
22년 숙원사업을 1년 반만에 이뤄내다
조직을 빠르게 정비한 20대 총동문회가 세운 다음 목표는 해공 신익희 선생 동상 건립이었다. 해공 신익희 선생 동상 건립은 1960년 이래 전 동문의 숙원 사업이었다. 하지만 사회적 혼란과 동문 사회 역량 부족으로 22년째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었다. 이에 남덕우(경제 46) 동상건립위 명예위원장과 유기정 추진위원장 등 임원들은 자신들의 명예를 걸고 20회기에 반드시 동상 건립 사업을 완수하기로 결의했다.
첫 시작은 해공 선생 기일을 4일 앞둔 1982년 5월 1일에 총동문회는 해공 신익희 선생 동상건립위원회 명의로 동아일보 1면에 광고를 게재한다. 동상 건립 목적과 동상건립위원회 발기인 명단을 게재한 이 광고는 전 동문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당시 전국 신문 1면 하단 광고는 매우 비싸고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주고 있었다. 이 광고를 보며 잊혀졌던 총동문회의 존재를 다시 기억해내고 긍지를 회복한 동문들이 매우 많았다.
동문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광고 게재 4일 후 수유리 묘지에서 진행된 해공 신익희 선생의 추모행사에는 1천 명의 동문이 몰려들어 역대 최대 인파를 기록했으며, 당일에만 목표 금액의 30%가 넘는 2천 5백만원(현재 화폐 가치로 약 1억원)이 모금됐다.
동상 건립을 위한 모금 열기는 뜨거웠다. 전국 각지를 넘어 멀리 중동에서도 성금이 답지했다. 임종 직전의 동문의 눈물 겨운 자진 헌납도 있었다. 학교 법인, 모교 총장을 비롯하여 재학생들도 학도호국단을 중심으로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결국 동상건립비용으로 상정됐던 7천만 원을 넘어 8천만 원이 걷히는 성과를 이뤘다. 결국 건립위원회 발족 1년 3개월 만인 1983년 7월, 모교 학생회관(현재 법학관) 앞에서 동상 제막식을 진행하며 동상 건립 사업을 완수하게 된다.
그동안 역량부족으로 번번히 무산됐던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함으로서 동문 사회 전반에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의식이 퍼져나갔다. 이것은 앞으로 설명할 동문회 주요사업 추진에 커다란 자산이 되었다.

성공의 기억은 동문회관과 해공장학회로
해공 선생 동상 건립 사업을 성료한 이후, 동문회 조직은 빠르게 성장해나갔다. 1985년에는 모금 과정에서 만들어진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부산동문회가 발족했으며, 1983년에는 제1회 국민인의 밤을 개최하고, 1986년에는 지금까지 동문 최고의 영예로 자리잡고 있는‘자랑스런 국민인의 상’을 최초로 시상했다.
한편, 총동문회는 해공 동상 건립 이후 동문회관 마련을 다음 역점 사업으로 선정했다. 동문회 활성화를 위해선 안정적인 활동 공간 확보와 재정 수입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21대 총동문회는 연회비를 인상하고, 영구회비 제도를 신설했다. 영구회비는 전액 회관 건립기금으로 적립했다. 여기에 1983년 34회 졸업부터는 졸업생들이 전원 입회비를 납부하고, 바로 다음 해인 35회 졸업 동문들은 전원 영구회비를 납부하면서 기금 마련에 동참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1989년 총동문회는 6년 간 모금한 약 5억 원의 기금으로 창성동 구 교사 옆에 위치한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에 위치한 현재의 동문회관을 매입하는 데 성공했다. 동문회관은 이후 현재까지 15만 동문의 사랑방이자 활동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어 1991년에는 동문 장학재단인 재단법인 국민대학교해공장학회가 설립되기에 이른다. 해공 신익희 선생 동상 건립, 동문회관 마련, 해공 어록비(독립기념관) 건립 등으로 총동문회의 위상이 굳건해지자, 모교가 그동안 재학생과 동문으로부터 받아 신탁하고 있던 장학기금 9천만 원을 총동문회에 기탁하며 동문 장학재단 설립을 제안했다. 이에 유기정 회장은 호응하여 동문 기금 2천만원을 더하여 자본금 1억 1천만원을 기반으로 해공장학회를 설립하게된 것이다.


총동문회의 현재를 만든 ‘거인’유기정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이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란 오래된 격언이 있다. 1981년부터 1991년까지, 유기정 동문이 총동문회장으로 재임했던 10년은 우리 총동문회의 가장 빛나던 시기 중 하나였다. 해공 신익희 선생 동상 건립은 우리 총동문회 역사상 가장 극적인 변곡점이었으며, 재임 기간 만들어진 자랑스런 국민인의 상, 동문회관, 해공장학회는 현재 총동문회의 가장 핵심적인 기반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 총동문회 74년 역사 상 가장 중요한 인물을 단 한 명만 꼽아야 한다면 주저 없이 유기정 회장을 꼽는 이들이 많은 것도, 2010년 서거할 때까지 사실상 종신 명예회장 대우를 받은 것도 유기정 회장이 이룬 업적에 대한 전 국민인이 보내는 존경의 증표다.
유기정 회장이란 작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우리는 그의 빛나는 모교와 동문회 사랑을 기억하고 전승해 나가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 국민대학교 역사자료집 Ⅲ, Ⅳ(국민대학교 교사자료위원회)
– 국민대학교 60년사(국민대학교)
– 국민대학교 구술자료집 Ⅱ‘국민인 70인에게 듣다’(국민대학교 교사자료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