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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신문》 지령 1000호를 축하하며

글 / 이계형(국사 92) 모교 교양대학 교수

2024년 3월 4일, 우리 대학 언론의 첨병인 《국민대신문》이 지령 1000호를 맞이했다. 1948년 12월 18일 《국민대학학보》로 창간되었으니 76년 만이다. 감개무량하다. 초창기 우리 대학의 신문 역사가 휴간과 속간을 반복하다가 비로소 1968년 12월 10일 자로 100호가 발행되었으니 말이다. 그 험난했던 우리 대학 신문사를 되짚어 본다.

《국민대학학보》 창간과 휴간 그리고 복간을 반복하다.

<국민대학학보 창간호>

1948년 한 해는 우리 대학으로서는 대학다운 면모를 갖추게 된 시기였다. 우리 대학은 1946년 12월 보인상업학교 건물을 빌어 ‘국민대학관’으로 출발하였지만, 번듯한 교사를 갖지 못해 어려움을 겪다가, 1948년 2월에 들어서야 창성동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국민대학으로 승격하였고 교표와 교가가 만들어졌으며, 국민대학 학우회가 주도하여 《국민대학보》가 창간되었다. 제호는 당시 학장이던 신익희가 썼다.

학우회 지도부는 다른 대학에 비교하여 손색없는 학보를 창간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남달랐다. 학교 측의 예산 지원도, 지도해 줄 교수도 마땅치 않았다. 이들은 학교 근처에 작은 방을 빌려서 창간호 작업에 매달렸다.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 해결하곤 하였다. 편집과 인쇄는 서울신문사에 의뢰하였고, 6~7차례 교열·교정을 거쳐 비로소 8면의 창간호가 탄생하였다.

창간호에는 “국민대의 자화상을 영출(映出)하고 순정(純正)한 학풍(學風)을 건립”하겠다는 포부를 담은 창간사와 ‘국민대학건립취지서’가 실렸다. 이에는 나라의 중심이 되는 인재를 육성하여 사회와 국가에 이바지하고자 하며, 법문계통·자연학과·종교과와 더불어 의학부 등을 포괄한 종합대학을 설립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이외 창간호에는 학생들에게 필요한 논문을 소개하는데 비중을 두었고, 교수들의 ‘헌법’, ‘경제원론’ 등 학술적 글과 함께 문화면에는 소설·시·수필 등을 공모하여 게재하였다. 이처럼 창간호는 시사 보도보다는 학술적 성격이 강하였다.

그런데 이후 학보는 신문 형태가 아닌 학술지 성격의 월간지(月刊志)만 발행되었다. 이마저도 창간과 휴간을 반복하였다. 이 또한 학생들만의 힘만으로 발간하는 데 힘에 부쳤다. 더욱이 교내 재단 분규까지 겹치고 6.25전쟁이 발발하여 학보 발간은 기약 없이 미뤄지기만 하였다. 1953년 9월 서울로 복귀하여 안정을 찾아갈 즈음 1955년 6월 25일 학술지 《학보》가 재발간(3호)되었을 뿐 신문 속간은 이뤄지지 못했다. 가장 큰 요인은 안정적인 재단을 확보하지 못한 이유가 가장 컸고, 설립자 신익희가 급서하는 바람에 한때 학교는 폐교 위기로 내몰렸다.

그러던 차에 금성방직 사장 김성곤이 우리 대학을 인수하면서 안정을 되찾았다. 그즈음 학보가 1959년 7월 1일 자에 《국민대학월보》로 제호가 바뀌어 6호가 발행되었다. 이때 주간 교수제가 도입되었고 언론지로서 제 기능을 되찾아 갔다. 1960년 4·19혁명 당시에는 대학 지성의 사회적 역할과 임무를 각성시키는 반독재 민주화 투쟁으로 언론의 책무를 다하였다. 그 뒤 월간에서 격주로 발행되면서 1962년 2월 《국민대학보》(28호)로 제호가 다시 바뀌어 대학신문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비록 1년에 5, 6번 간행되는 정도에 그쳐 대학신문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지 못하기도 하였지만, 1964년부터는 9, 10번 정도로 늘어나 어느 정도 긴 공백을 메꾸어 나갈 수 있었다.

1970년대 《국민대학보》로 새 출발하다.

우리 대학 신문 제호의 변천(1948~2023)

《국민대학보》는 1971년 9월 창성동에서 지금의 정릉으로 교사를 이전한 뒤에도 계속 발간되었다. 《국민대학보》는 「웅비하는 교학(敎學)의 전당…정릉캠퍼스」라는 제호로 캠퍼스 이전의 기쁨을 노래하였다. 이후 방송국 개국(1973년), 영문신문 The Kookmin Times 창간(1975년)과 더불어 《국민대학보》는 주간지로 개편하고, 면수를 늘려 대학신문의 면모를 다져나갔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어느 대학보다 자율적으로 학보 제작 과정에 외부의 간섭은 전연 없었다는 점이다. 오직 오직 학생기자단에 의해 편집, 제작되었다. 그러면서 우리 대학만의 정체성을 가진 신문으로 거듭났고, 남다른 전통과 역사를 쌓을 수 있었다.

1970년대 국민대신문사는 신문 발간 외에도 다양한 문화행사를 주관하면서 대학문화를 선도하고자, ‘국민문학상’이 제정되었다(1976년). 이는 1979년 제4회부터 ‘북악문화상’으로 바뀌어 문학·학술 분야의 현상공모를 받아 수상자를 선정하였는데, 2023년 11월 제48회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이끌고 1990년대 대학신문 선도하다.

1980년대 우리 대학은 꿈에 그리던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면서 기분 좋게 출발하였다. 1980년 9월 9일 자 사설에서는 “개교 이래 최대의 숙원이던 종합대학 승격의 꿈”을 이뤘고, “명실상부한 종합대학으로서의 웅비의 나래를 맘껏 펼치게 되었다”라면서 그 의미를 되새겼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의 폭압적인 신공안 정국은 자유와 민주를 갈망하는 국민의 함성을 뭉갰다. 이때 《국민대학보》는 12면으로 증면하여 민주화운동을 이끌어 전국 10대 대학신문으로 꼽혔다. 이는 대학신문의 역할에 충실하고 질적·양적 발전을 거듭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또한 《국민대학보》는 위상에 걸맞게 변화를 모색하였다. 우선 개교 40주년을 맞아 1986년에 그동안의 칼럼을 묶어 『지성과 학문 : 북악 40년의 메아리』을 간행하였고, 1988년 11월 창간 40주년을 맞이해 신문을 전면적으로 개편하였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로·세로 혼용 방식에서 벗어나 전면 가로쓰기로 편집 체계를 개편하고, 기사 내용도 대학 구성원의 다양한 요구를 반영하는가 하면, 우리 대학을 알리는 홍보 역할도 훌륭하게 수행해 갔다.

1989년 4월 17일자 《국민대학보》에 발표된 국민대 학생 의식조사

1990년대에는 정치 성향과는 거리가 있는 교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비판적인 시각에서 학내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총학생회와 함께 개인 머그컵 갖기 운동, 학내 예절 문제, 대리 출석·도서관 자리 대신 잡기·컨닝·학내 시설 사용 등에 대해 자성의 목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1998년 창간 50주년을 맞아서는, 신문 글자체를 개선하여 가독성을 높였고, 대학 생활면을 확대하여 교직원 동정·학생 생활·각종 소식 등을 담았으며, 취업정보란과 컴퓨터 지면을 신설하는 등 시대에 맞춰 변화를 모색하였다.

특히 1991년부터 한국의 대학 사회에서 최초로 《국민대신문》의 축쇄판을 간행하였다. 대학신문 자체가 매우 귀중한 ‘사료(史料)’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1991년 10월에 축쇄판 1권과 2권을, 1993년 4월에 3권, 1995년 3월에 4권을, 그리고 2006년에 8권을 간행하였다. 이후 2016년 개교 70주년을 맞아 축쇄판 10권을 냈다. 이는 국민대신문사의 업적이자 국민대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남았다.

개교 50주년 기념 《국민대학보》 특별호(1996. 10. 18)

2000년대, 새천년을 맞아 ‘국민대 신문방송사’로 거듭나다.

2000년에 들어서면서 우리 대학 신문은 국민인* 모두를 위한 언론지로 거듭났다. 우리 대학이 새로운 UI를 선포하면서 웅대한 발전을 모색하던 시기에 맞춰 대학 내의 언론 통합을 일궈냈다. 2002년 11월 대학 언론의 정립, 학풍 조성과 대학 문화 창달, 대학 발전을 위한 홍보 등의 기능을 수행하고자, 국민대신문사·The Kookmin Review·국민대방송국 등을 통합한 ‘국민대신문방송사’로 새롭게 태어났다. 아울러 2003년 3월에는 《국민대신문》으로 제호를 바꾸고 정확·공정·창의를 사시(社是)의 바탕으로 언론의 전문성을 강화해 갔다. 지면 또한 대학보도, 사회문화, 기획취재, 특집, 오피니언 등으로 다양화되었다.

그뿐 아니라 국민대신문사는 교내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2003년 4월부터 12월까지 녹색캠퍼스 캠페인을 벌여 ‘차 없는 녹색캠퍼스’를 실현하였으며, ‘움직이는 가게’를 운영하여 ‘아름다운 가게’ 캠퍼스 1호 국민대점을 여는 등 활동 반경을 넓혀 나갔다.

국민대신문사가 제작한 학생들이 디자인한 ‘차 없는 캠퍼스’ 포스터(2004)

국민대신문1000호를 맞아 대학 언론으로서의 더욱 발전하길 바란다.

제999호 《국민대신문》 2023년 11월 27일 자

21세기 다양한 정보화시대를 맞아 대학신문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여느 대학의 신문들도 경험하는 바다. 이제 대학신문은 기존 방식의 계몽적 역할, 사실 보도, 여론 수렴 등을 넘어서야 한다. 우리 대학 구성원이자 독자인 재학생(학부·대학원생 포함) 2만여 명, 교수 1,000여 명, 직원 470여 명 등과 10만여 명에 달하는 동문의 독자층에도 다가서야 한다. 독자들이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짚어 신속하고 바른 정보전달과 더불어 자랑스러운 대학으로 만드는 데도 앞장서야 한다. 여기에 아카데미즘의 역할도 수행해야 하는 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물론 이에 발맞춰 《국민대신문》은 미디어부를 운영하면서 SNS에 카드 뉴스를 올려 학우들이 더 쉽고 빠르게 기사를 접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국민대신문 배포대를 늘리는가 하면 신문을 읽고 있는 모습을 SNS에 사진으로 인증하는 신문 리뷰 이벤트를 진행하는 등 독자층을 넓혀 나가는 데 노력하고 있다. 이와 함께 대학신문이 가지는 전문성과 시사성, 시대를 꿰뚫는 통찰성을 함께 지녀 ‘국민대신문’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가 찾아질 것이라 믿는다.

오늘날 우리만의 대학신문을 만드는데 주간 교수가 50여 명에 달하고 학생기자만도 5백여 명이나 된다. 특히 역대 기자들 모임인 ‘필밭’은 선후배 간을 이어주는 교량이 되면서 국민대신문사의 오래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우리 대학의 신문이 발전해 올 수가 있었다. 다시금 그들의 노고에 감사드리면서 국민대신문이 새로운 발전을 이룩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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